블랙잭 나이트 — 킹과 에이스, 그리고 새벽 국밥
2월 마지막 금요일, 신사역 블랙잭 파티. 빙고 게임, 귓속말 벌칙, 17000원짜리 두통약. 그리고 옆자리에서 자꾸 눈이 가던 사람.
2월의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넷플연가. 연애의 참견. 그 이름의 독서 모임에서 시작된 인연이 있다. 불안형 애착과 회피형 애착이 뭔지, 사랑에도 패턴이 있다는 걸, 책 한 권 한 권 넘기며 배웠던 시간.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의 단톡방에 파티 모집 글이 올라왔다.
오프나인. 블랙잭 컨셉 파티. 신사역 근처.
금요일 저녁, 시간이 됐다. 그냥 가기로 했다.
도착하니 초록색 펠트 천이 깔린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진짜 카지노 테이블이었다. 칩도 있고, 트럼프 카드도 있었다. 누군가 셔플하는 소리가 음악 사이로 들렸다.
테이블에 앉으면 빙고 카드 한 장과 질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블랙잭 게임 1등할 것 같은 사람’, ‘가장 친해지고 싶은 사람’, ‘카지노에 가봤을 것 같은 사람’, ‘인스타 교환하고 싶은 사람’ — 아홉 칸짜리 빙고. 각 칸에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 다른 테이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으면 빙고를 완성할 수 없는 구조였다.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어색한 자기소개를 시키는 대신, 게임이라는 핑계를 만들어준 거다. 사람들은 빙고를 채우려고 자연스럽게 다른 테이블로 건너갔고, 웃으며 이름을 적었다.
첫인상 게임도 있었다.
‘이 사람을 트럼프 카드 속 리더십 있는 King, 포용적이고 잔잔한 Queen, 재밌는 Jack 중에 어느 이미지 타입에 가깝나요?’
오른쪽으로 종이를 돌리면서, 각 사람에게 느낀 첫인상을 한 마디씩 남기는 방식이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들고 잠깐 멈칫했다. 누군가에 대한 첫인상을 한 줄로 요약한다는 건, 그 사람을 어떤 프레임에 가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이 게임의 매력이었다. 한 줄이니까 솔직해질 수 있다.
귓속말 게임도 있었다. 정확한 규칙은 기억나지 않는데, 뭔가에 걸리면 MC가 지정하는 벌칙을 해야 했다. 누군가는 춤을 췄고, 누군가는 고백 연기를 했다. 대규모 술자리 특유의 에너지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술자리라서 그런지 머리가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신사역 근처니까 약국이 있겠지 싶어서 밖으로 나왔다. 24시간 약국을 찾았다. 부루펜 하나 달라고 했다.
약사가 한방약과 간에 좋은 약을 추천해줬다.
17,000원.
부루펜이면 2,500원인데. 새벽에 24시 약국에 찾아온 사람한테 한방약 세트를 권하는 비즈니스 센스가 대단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먹자마자 3시간 뒤에 두통이 싹 나았으니까. 돈값은 했다.
다시 파티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꾸 옆자리 사람에게 눈이 갔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냥 시선이 계속 그쪽으로 흘렀다. 빙고 카드에 이름을 적을 때도, 첫인상 종이에 한 줄을 쓸 때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향해 쓰고 있었다.
그 사람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픽’을 받는 순간이 있었는데, 우리 둘이 나란히 호명될 때 뭔가 — 킹과 퀸 같은 느낌이 스쳤다. 블랙잭 테이블 위의 K와 A처럼.
나보다 한 6살은 어려 보였는데,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안 났다.
파티가 끝나고, 그 사람의 친구분과 함께 걸었다. 데려다준다고 했다. 친구분을 먼저 내려드리고, 근처 전집에 들어갔다. 국밥을 시켰다.
새벽 국밥집에서의 대화는 묘했다.
알고 보니 같은 스타트업 씬의 사람이었다. 소개팅 앱을 기획했던 사람. 연애와 기술의 교차점에서 일하던 사람. 이야기가 잘 통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국밥 국물이 따뜻했다. 2월 마지막 밤의 공기는 차가웠고, 그 온도 차이가 묘하게 좋았다.
하지만 집에 가서 자고 일어나니, 뭔가 끝이 보였다.
연락을 안 하게 됐다. 하기 싫었다기보다는, 하지 않게 됐다.
나중에 잘 돼서 깊은 관계가 됐을 때 — 같은 스타트업 씬이라서 힘들어질 미래가 잠깐 보였다. 업계가 좁다. 소문이 빠르다. 잘될 때는 괜찮겠지만, 안 될 때 그 거리감이 직업적 관계까지 침범하는 순간이 올 거다.
핑계 같기도 하다.
나이 차이가 생각보다 안 나서 안 맞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도 핑계 같다.
30대의 연애는 이래서 힘든 건지도 모른다.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본다. 감정보다 계산이 먼저 돌아간다. 좋은 사람인 걸 알면서도, 좋은 사람이라서 오히려 시작을 못 한다. 상처를 줄 게 보이니까. 받을 게 보이니까.
블랙잭은 21에 가까울수록 이긴다. 하지만 21을 넘기면 버스트, 그 순간 모든 게 끝난다.
그날 밤 테이블 위의 카드는 킹과 에이스였다. 완벽한 21.
하지만 연애에서 완벽한 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가끔 국밥집 앞을 지나면 속도를 줄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