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밤, 영어로 말하는 법을 배운 건 아니었다
강남 영어스터디 LST에서 보낸 월요일 저녁. Surfer 수업이 끝나고 Racer 반에 게스트로 들어갔다. 영어를 배우러 갔는데, 사람을 읽고 왔다.
월요일 저녁 7시, 강남역 근처 스터디룸.
나는 매주 이 시간에 여기 온다. LST라는 영어스터디 그룹인데, 레벨별로 반이 나뉘어 있다. Beginner, Racer, Runner, Surfer. 나는 Surfer반. 이름만 들으면 서핑하러 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좁은 방에서 영어로 떠드는 거다.
7시 수업은 빠르게 지나갔다. 늘 그렇듯.
8시 반. Racer반 리더에게서 연락이 왔다. 게스트로 와보지 않겠냐고. Racer는 Surfer보다 한 단계 아래인데, 분위기가 다르다고 들었다. 궁금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테이블 배치가 평소와 달랐다.
직사각형 테이블 하나. 리더가 벽을 등지고 가운데 앉아 있었다. 왼편에 네 명, 오른편에 네 명. 마치 소개팅 자리처럼 남녀가 번갈아 앉아 있었다.
나는 왼쪽 끝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에 그녀가 있었다.
화이트보드에 질문이 적혀 있었다.
MBTI.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음식. 무슨 일을 하는지.
아이스브레이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어색함을 깨는 장치. 근데 이게 영어로 진행되니까 묘한 일이 벌어진다. 한국어로는 너무 뻔해서 안 할 질문들을, 영어라는 방패 뒤에서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What’s your MBTI?”
한국어로 물으면 좀 유치하다. 영어로 물으면 가볍다. 그 차이가 꽤 크다.
토론 주제가 하나씩 올라왔다.
“How do you approach someone you’re interested in?”
은근하게 다가가는 법. 이 주제가 나오자 테이블의 온도가 올라갔다. 영어로 flirting을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다들 단어를 찾느라 웃었다.
“What does ‘sparkle in their eyes’ mean to you?”
눈빛에 반짝임이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누군가는 eye contact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genuine interest라고 했다. 나는 그냥 — 그 사람이 나를 볼 때 눈이 웃는 거라고 했다. 입은 웃지 않아도 눈이 웃는 사람. 그게 sparkle이라고.
옆자리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가 빠르게 바뀌었다.
Glass half full or half empty. Done is better than perfect. Street smart versus book smart.
다 영어 토론 주제인데, 실은 그 사람의 인생관이 드러나는 질문들이었다. 영어 실력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먼저 보였다.
Love language.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나는 Quality Time이라고 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선물도, 말도, 스킨십도 좋지만 — 결국 같이 있어주는 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누군가 물었다.
“What’s the best gift you’ve ever received?”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기억에 남는 선물. 브랜드 이름이 나오고, 여행 이야기가 나오고, 경험을 선물받은 이야기가 나왔다.
내 차례가 왔다.
잠깐 생각했다. 물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사람이 떠올랐다.
“Her existence.”
그녀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었다고.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1초. 2초.
그리고 다들 웃었다. 감탄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옆자리 그녀가 나를 봤다. 나는 괜히 물을 마셨다.
내가 한 말인데, 말하고 나니 좀 부끄러웠다. 영어스터디에서 이런 답을 할 줄은 나도 몰랐다.
존재가 선물이라니. 그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정의에 가까웠다.
마지막 주제.
“Best first date spot?”
누군가 escape room이라고 했다. 배드민턴이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활동적인 답들이 오갔다.
나는 한강이라고 했다. 저녁에.
이유는 단순하다. 돈이 안 든다. 편의점에서 뭐 하나 사서 앉으면 된다. 근데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다. 한강은 대화를 강제한다. 놀이기구도 없고, 메뉴판도 없고, 할 게 없다. 그냥 옆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첫 데이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있을 때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지. 대화가 자연스럽게 흐르는지. 그걸 확인하려면 한강만 한 데가 없다.
9시 반쯤 수업이 끝났다.
강남역 방향으로 걸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영어 실력이 늘었는가. 솔직히 모르겠다. 단어를 몇 개 새로 알게 된 것도 아니고, 문법이 교정된 것도 아니다.
근데 사람을 읽는 연습은 했다.
영어로 말할 때 사람들은 조금 더 솔직해진다. 모국어의 관성이 없으니까. 습관적으로 쓰던 말투, 사회적으로 학습된 대답 — 그런 게 벗겨진다. 영어라는 불편한 도구를 쓰는 동안 그 사람의 생각이 날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영어스터디가 좋다. 영어를 배우러 가는 건데, 사람을 알게 된다.
월요일 밤이 끝나간다.
“Her existence.”
그 문장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다. 존재가 선물이 되는 사람.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인가.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오늘따라 좀 물음표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