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코더인가, 기획자인가, 실행자인가
클로드 에이전트를 다루는 개발자와, 그런 개발자를 다루는 매니저. AI 시대, 내 정체성은 어디쯤 있을까.
수요일 밤, 개발자 친구 한 명이 위워크에서 일해서 거기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멈췄다.
그들은 클로드 코드의 서브에이전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LSP가 어쩌고, 딜리게이트 모드가 어쩌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내 안에선 이상한 낯섦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지금 뭘 하는 사람인가.
소개팅에서 늘 듣는 질문
“AI 개발자세요? 그럼 AI 툴 뭐가 제일 좋아요?” “AI가 일자리 다 뺏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즘 코딩은 AI가 다 해주지 않나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듣는 질문들이다. 파이썬 학원 다녔다는 사람, 러버블로 홈페이지 만들었다는 사람, 세미나에 열심히 다니며 자기계발에 진심인 분들.
그들에게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맞아요, AI가 다 해줘요”라고 하긴 뭔가 찜찜하고, “아니에요, 그래도 사람이 해야죠”라고 하기엔 내가 매일 클로드한테 코드를 시키고 있으니.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개발자와 ‘바이브 코더’는 다르다는 것.
한 줄 에러를 위해 밤을 새본 사람
과연 그들은 한 줄 에러를 잡기 위해 몇 시간 고뇌하고 잠도 못 잔 경험이 있을까. 해결이 안 돼서 친구한테 물어보고, GitHub 이슈에 들어가 찾아보고, 비슷한 글 남긴 사람에게 메일 보내고. 하루하루 기다리다가 답변이 오면 너무 기분 좋지만, 갑자기 샤워하고 나서 다시 보니 문제를 찾아내 혼자 해결하고.
그 일련의 과정을 겪어본 개발자와, 그렇지 않은 바이브코더, 그리고 비개발자와의 차이는 천지차이 아닐까.
구글어스로 여행하는 것과 직접 비행기 타고 가는 것만큼이나.
클로드가 삶을 너무 경시했다
그날 밤,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클로드 없다고 생각해 봐. 지금 우리 못 할 것 같아.”
다들 웃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괄호 열고 닫기도 안 한 지 오래됐고, 세미콜론 언제 썼는지도 기억 안 난다. 랭그래프는 썼지만, 그걸 내가 짠 건지 클로드가 짠 건지 경계가 흐릿하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클로드 쓰는 사람을 또 에이전트로 돌려서 자동화했어요.”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내 위치가 이상해졌다.
팀장 권한이 다 있네, 혼자 일 다 하고
클로드 코드 팀 모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가 말했다. “팀 리더 에이전트 돌리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딱 떴어. ‘팀 리더가 당신에게 업무를 종료하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진짜 종료되는 거야.”
무서웠다고 했다. 하늘에서 신이 보고 있는 것처럼, 네모 칸 쳐진 메시지가 떴다고.
“팀장 권한이 다 있네, 혼자 일 다 하고.”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나는 이제 매니저인가
나는 요즘 회의록 자동화, 프론트단 구현 자동화, 백엔드 피처 제작을 Supabase로 하는 정도다. 서브에이전트나 LSP까지 사용하는 친구들을 보니, 갑자기 내가 낯설어졌다.
나는 코더인가. 기획자인가. 실행자인가.
문득 드는 생각.
매니저인 나로서는, 클로드 에이전트를 사용하는 인간 에이전트를 다루려면 어떤 스킬이 필요한가.
이건 단순히 도구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날 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계속 떠들었다. 나는 클로드 코드로 만든 마술 메모장 앱을 시연했고,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다른 친구는 한글 문서 파싱 API를 직접 만들고 있다고 했다.
다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무엇을 만들고 있나.
대표님의 전화, 그리고 기업의 의미
오늘 아침, 대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기업 팁스 제안서에 네 이름 CTO로 적어도 되겠어? 그쪽은 기술적인 엣지가 없어서…”
물론이죠, 마음껏 넣으세요.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은 예전 VC 면접에서 들었던 질문이었다.
“기업이란 뭐라고 생각하나요?”
갓 박사 졸업 후, 연구 오리엔티드 기업에서 리서치 사이언티스트로 일하던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기업이란 직원들 하나하나, 그 가족까지 책임져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들으면 참 순진한 답이다.
이제 내 답은 이렇다.
“기업이란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직원은 비용이다—까진 아니더라도, 직원 오리엔티드한 사고는 많이 사라졌다. 요즘엔 사업자 마인드로 바뀐 나를 보면, 어쩌면 좀 차가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정부과제의 양면성
예전엔 정부과제를 싫어했다. ‘진짜 비즈니스’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어차피 남들 주느니 내가 하면 안 되나?”
현금 흐름이 좋아지는 건 나쁘지 않다. 물론, 도메인이 전혀 다른 정부과제만을 위한 좀비 기업이 되는 건 별로지만. 방향성이 맞다면야, 와이낫이다.
정부과제를 잘 해내는 기업이 있고, 돈을 잘 버는 기업이 있다.
둘 다 될 수 있다면 그게 최선 아닐까.
벤처 스피릿은 아직 남아 있을까
창업 동아리 시절, 러브샷 스피드 소개팅 서비스로 첫 결제를 받던 그 떨림.
그때의 벤처 스피릿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진정 그 떨림이 아직 남아 있을까.
그 떨림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나는 클로드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 창밖으로 흐르는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는 ‘무엇을 만드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만드는가’가 더 중요한 시대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에 AI가 포함되든, 사람만 포함되든.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